<보케리니 첼로 협주곡 B♭장조>
 1743년 루카에서 태어난 보케리니는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펼치던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였다. 그는 11개의 협주곡을 남겼는데, 그 중 2~3개 작품이 현재에도 음반 등을 통해 연주 되고있다.
 보케리니 전곡을 정리한 자라르는 이 곡이 1770년을 전후로 작곡되었다고 추정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B♭장조는 19세기 말 그뤼츠마허에 의해 개작된 것이다.그러나 1948년 스위스의 슈투르체네거가 드레스덴 국립도서관에서 원본을 찾았고, 1950년에는 슈피글이 런던의 헌 책방에서 보케리니 필치라고 생각된 이 협주곡의 1,3악장과 동일한 소나타 원보를 발견함으로써 현재의 곡이 완전히 낭만 풍으로 개작된 것임을 재 확인 했다. 특히 현재의 2악장은 원래 3번 G장조의 2악장을 빌려온 것이다.
 보케리니 음악에는 바로크 전통에 대한 향수, 로코코적 취향, 고전적 형식, 낭만적 표현 등이 용해되어 그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 점이 하이든의 깊이와 웅대함에 비교되어 보케리니는 '하이든의 부인'이라고까지 불린다. 그는 첼로와 실내악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또한 협주곡 양식을 확대하고 기법을 비약시켜 첼로를 독주악기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슈만 첼로 협주곡 A단조>
 슈만이 첼로 협주곡을 작곡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현재에도 첼로 연습곡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쿰머, 그뤼츠마허, 그라바우, 롬베르그 등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들과 예술적으로 교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영향보다는 그 자신이 어려서 첼로를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첼로가 지닌 시적, 애가적, 열정적인 기질과 숨은 기능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곡은 1850년 10월에 뒤셀도르프에서 작곡, 6일만에 스케치를 끝내고 8일 후 완성했다고 한다. 이렇게 단숨에 작곡이 가능했던 이유중 하나는 슈만의 병상을 지켰던 아내 클라라였다. 그녀에 의하면 슈만은 심한 환각증세에 시달리다 깨어나면 고통을 무릅쓰고 이 작품을 수정, 보완하려 안간힘을 쓰곤했다고 한다. 이 협주곡은 1860년 6월 9일 라이프치히 음악원 연주홀에서 열린 슈만의 50회 생일 축하 연주회에서 에베르크에 의해 초연되었다. 초연 즉시에는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슈만이 사망한 직후 포퍼, 코스만, 다비도프 등 명 연주가의 연주로 모든 첼리스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협주곡 중의 하나가 되었다.

<랄로 첼로 협주곡 D단조>
 랄로는 프랑스 릴의 스페인가계 출신으로 유년시절 릴 음악원에서 베토벤 지휘로 연주한 바 있다는 첼리스트 보만을 사사했다. 대를 잇기 원했던 부친의 희망을 저버리고 16세에 집을 더나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했지만 고루한 교육방법과 어려운 생활로 고달픈 학창시절을 보낸다. 
 그는 초기 작품들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관현악을 위한 디베르멘토가 발표되면서 비로소 조그마한 성공을 거두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50회 생일 전날이었다.  그 후 1873년 사라사태가 연주한 바이올린 협주곡이 대 성공을 거두고 스페인 교향곡에 이어 1878년 첼로 협주곡이 발표되자 작곡가로서 랄로의 위치는 확고해지며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게된다.
 D단조 협주곡은 1877년에 작곡, 그 다음 해 파리에서 피셔에 의해 초연되었고 그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어려서 스승이던 보만의 가르침, 즉 "평범하다 혹은 관용적이다 함을 경계하라, 그렇다고 괴상하면 더욱 안된다. 그리고 남이 하기 때문에 행하기보다는 자신이 하고싶다고 느낀 것 만을 행하라" 고 한 말을 늘 잊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비록 50세가 될 때 까지 기다림이 있었지만, 랄로는 확실히 남이 따라 할 수 없는 작품활동과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2008년 3월 음악세계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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